역사 칼럼

호갱

東安齋 2016. 5. 22. 18:12

[설왕설래] 호갱

세계일보 입력 2016-05-20 20:15:48, 수정 2016-05-20 20:15:48


10년 넘은 일이다. 중국 거리를 오가는 승용차 둘 중 하나는 ‘다중(大衆)’ 차였다. 다중은 1980년대 중국에 진출한 폴크스바겐의 중국 이름이다. 폴크스바겐의 파사트. 인기가 대단했다. TV드라마에 나오는 돈 많은 주인공의 차는 어김없이 이 차였다. 그때만 해도 중국을 대표하는 국산차는 ‘기름 먹는 하마’ 훙치(紅旗) 정도였다. 지난해 중국군 열병식 때 시진핑 주석이 탔던 차가 바로 훙치다.

2000년대 중반 작은 이변이 생겼다. 베이징에 공장을 지은 현대차. NF쏘나타를 만들었다. 눈길을 끈 것은 차 값이다. 중국산 NF쏘나타는 파사트보다 비쌌다.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렸다. 왜 그랬을까. 손에 착착 달라붙는 내장재로 무장한 쏘나타. 까칠까칠한 파사트. 폴크스바겐은 중국인 경제력에 맞는 가격대를 맞추기 위해 값싼 소재를 썼던 걸까.

궁금증이 인 것은 몇 년 뒤다. 우리나라에 수입된 파사트는 4000만원대였다. NF쏘나타는 2000만원대 초중반.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하필 파사트를 샀을까.” 그때만 해도 외제차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많은 돈을 지불하자면 뽐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을 텐데 ‘다중 파사트’를 본 사람의 눈에는 영 고급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미국, 유럽연합(EU)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 가격차이를 낳는 관세의 벽을 허무는 조치 아니던가. 허물어졌는가. 차 값은 요지부동이다. 해외에서 싼 차도 바퀴가 우리 땅에 닿는 순간 비싸진다. 차 값만 그런가. 명품 이름이 붙은 물건이면 모두 그렇다. 오죽하면 “명품 이름 붙이기만 성공하면 한국에서는 떼돈 번다”는 소리가 나올까.

폴크스바겐의 배짱은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렇다. 미국에서는 배기가스 조작을 한 문제 차량을 환매하기로 했다. 대상 차량은 약 50만대. 대당 3000만원이면 15조원이 든다. 1인당 5000달러를 배상하기로 했다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차 값을 6∼7% 정도 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상은커녕 알량한 리콜도 얼마나 엉성했던지 퇴짜를 맞았다.

‘정직한 독일인’.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독일은 폐허를 딛고 일어난 한국인에게는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폴크스바겐이 그 생각을 흔들어 놓는 건가.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다. 아직 선진국 기술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머리에 각인된 명품이라면 가격을 따지지 않는다. 호갱을 낳는 심리 구조다. 한 조선 실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누에를 치면서도 비단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철을 생산하면서도 칼과 거울을 왜에서 들여온다. 천하에 형편없는 기술만 가진 것인가.” 스스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생각하지 않고 남 손가락질만 해서 무엇할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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