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폭죽놀이

東安齋 2010. 7. 3. 01:09

[설왕설래] 폭죽놀이

 

 원시적인 형태의 화약인흑색화약 만들어진 때는 분명치 않다. 여러 설이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진 때라고 하기도 하고 당나라 때라고도 한다. 그때 만들어진 화약은 귀족의 사치놀음인 폭죽놀이에 주로 쓰였다. ‘귀신을 쫓는다 믿음도 따라붙었다. 그런 탓에 중국인은 지금도 명절에는 폭죽을 터뜨린다. 화약무기가 위력을 떨친 것은 청나라 때다. 청의 어린 순치제 섭정을 했던 두얼군(多爾袞) 대포를 앞세운 팔기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 명을 멸망시켰다.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처음 만든 것은 고려 말엽이다. 최무선은 20년이 넘도록 화약 개발에 매달렸다. 북에는 홍건적, 남에는 왜구가 출몰했으니 무기를 만들어야 했던 탓이다. 그는 1373 마침내 화약을 만들게 된다. 이후 화약 재료인 염초를 얻기 위해 퇴비란 퇴비는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했다. 퇴비에는 팔만대장경과 똑같은호국 바람이 담겨 있었다. 고려는 물론 조선에서도 폭죽놀이를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얻기 힘든 염초를 놀음놀이를 위해 탕진할 없었기 때문이다.

평양 대동강변에서 밤새도록 터진 폭죽놀이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이명박 대통령도 한마디 했다. “북한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김정일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게다. 부끄러웠을까, 화가 났을까. 후자일 같다. 대대손손 독재권력을 누리는 그에게정신차리라 했으니 뜨끔했을 것이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폭죽놀이에 쏟아부은 돈이 60억원이라고 한다. 20㎏들이 131868포를 있는 돈이다, 쌀값 비싼 남한에서 그것도 소비자 가격으로. 화폐개혁 실패로 굶어 죽어가는 주민이 속출하는 판에 가당치가 않다.

지도부는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런 폭죽 쇼를 했을 것이다. 허장성세가 따로 없다. 주린 배를 움켜쥔 북한 주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대한 수령 동지, 불꽃처럼 빛나소서라고 했을까. 아닐 것이다. 많은 나라들 중에 하필이면 북한에 태어난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좇으면 ()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다.

강호원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4.21 () 19:22, 최종수정 2010.04.21 () 19:21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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