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고려장 당해야 할 세대<세계일보>
빚으로 인기 사는 ‘협잡꾼 선거문화’
‘망국의 길’ 이끄는 복지·개발 공약들
15년쯤 된 일이다. 나라살림을 책임지던 한 인사가 자리에서 물러나며 이런 말을 했다. “꼭 부탁드립니다. 정부가 적자예산을 편성하려고 하면 사정없이 조져주세요.” 이런 말도 했다. “적자예산을 꾸려야 할 때는 딱 한 번뿐입니다. 남북통일 할 때입니다.”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할 때 기자들이 흔히 쓰는 ‘조진다’는 다소 비속한 말을 점잖은 분이 쓴 것은 꼭 그래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요즈음 나라살림이 누더기로 변하니 그의 말을 곱씹게 된다. 올 연말에는 공기업 빚을 빼고도 400조원대의 빚더미 공화국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선거철을 맞아 봉사·헌신을 외치는 출마자 열이면 아홉은 ‘돈 쓰겠다’는 말을 쏟아낸다. 사재를 털겠다는 게 아니라 나랏돈을 쓰겠다는 것이다. 풍요롭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드물다. 인지상정이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당선되면 반드시 ○○을 하겠다’는 소리가 난무한다. 무상보육, 무상교육, 무상급식, 명품·일등 도시 건설, 철도유치, 도로건설….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출마자 개인뿐 아니다. 정당까지 돈 쓰는 일에 두 팔 걷어붙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쏟아내는 걸까. 유권자의 마음을 사야 한다고? 그런 얄팍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겠다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돈을 어떻게 마련할 거냐’고 물으면 입을 다문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산 전용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냐? 정 안되면 채권 발행하면 되지.” 그래서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라를 빚더미에 앉힐 사람은 아예 이 땅에서 청소해버려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갖고 선거판에 나선 사람은 국민을 쪽박 차게 하는 사기꾼이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참담한 빚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빚은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다르다. 이전에는 생산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2000년대에는 비생산적인 부조가 빚을 늘리는 특성을 갖는다. 규모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다. 외환위기를 이겨낸 김대중정부가 남긴 나랏빚은 이전 빚과 합쳐 133조6000억원. 그런 빚은 노무현정부 5년 동안 165조3000억원이나 불어나더니 이명박정부에서는 올해 말까지 108조원이 늘어난다.
나랏빚이 이처럼 늘어난 이유는 빤하다. 경제를 살린다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며 돈을 마구잡이로 쓴 결과다. 돈이 있어 풀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빚을 내 푼 것이 문제다. 유권자의 환심을 사보자는 얄팍한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게 끌어들인 빚은 대부분 현 세대를 살찌우고 있다.
그 빚은 누가 갚아야 하나. 눈덩이처럼 커진 나랏빚을 현 세대가 갚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빚을 떠안는 사람은 공부하는 학생들, 아장걸음 하는 어린아이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딸들이다. 우리 사회는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다. 조금 있으면 노인 대열에 합류할 기성세대가 감당하지 못할 빚까지 만들어놓고 있으니 현 세대야말로 가난을 물려주는 장본인이다. 후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려장 해야 할 세대다.
빚 문제가 암담한 것은 빚이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 패거리와 맞물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그스(PIIGS)로 일컬어지는 유럽국가 재정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빚으로 복지를 떠받친 협잡꾼식 정치 문화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피그스 나라의 재정도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지난 수십년간 정권을 잡기 위해, 당선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빚을 끌어들인 결과 국가재정은 임계점을 넘어 파산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외환 유동성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모자란 유동성을 보충하면 되지만 빚으로 인해 터진 경제난은 해결하기 힘들다. 빚을 탕감받지 않는 이상 가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기에 빚을 내 정권을 유지하고자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길을 걷고 있다. 복지를 외치지 않으면 유권자의 표를 얻지 못하니 망국의 길이 훤히 보인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국가부채 비중 34%. 재정파탄 국가에 비해 안정적이라고 떠든다. 오십보백보다. 빚을 양산하는 구조가 똑같은 탓이다. 빚에 기대어 달콤한 사탕발림의 공약을 쏟아내는 자는 ‘공공의 적’이다. 그런 자의 말을 믿고 이기적인 삶을 누리려는 사람이 많으면 현 세대는 고려장 당할 운명을 맞게 된다. 우리의 아들딸은 정신 나간 아버지 어머니를 심판하게 될 게다.
강호원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0.05.26 (수) 19:23, 최종수정 2010.05.26 (수)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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